사진과 함께 하는 ‘이스탄티노플’ 역사 기행 8
-전쟁의 전초 기지 루멜리 히사르
그 전쟁은 선전포고도 없이 시작되었습니다. 아니, 어쩌면 언어나 문자를 통한 공식 선언만 생략되었을 뿐 그 자체가 무시무시한 선전포고였는지도 모릅니다.
각양각색의 크고 작은 돌들이 ‘부조화 속의 조화’를 이루며 성벽을 구성하고 있는 모습이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문 양 옆에 매달린 갓등도 제법 운치가 있다. 옛날에는 여기에 수문장이 지켜 서 있었겠지?
*1452년 4월 15일, 콘스탄티노플 사람들은 드디어 우려했던 일이 현실로 나타났음을 확인하고는 경악과 공포에 사로잡혔습니다. 그 전해 겨울부터 보스포루스 해협의 유럽 쪽 가장 협소한 지역에서 크고 작은 돌들을 한 곳에 모으며 뭔가를 준비하던 오스만의 군사들이 술탄 메메드 2세의 지휘 아래 본격적으로 요새를 새로 짓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바로 ‘루멜리 히사르’(Rumeli Hisar, ‘유럽의 성’이란 뜻)가 그 주인공입니다.
콘스탄티노플은 그 당시 요즘으로 치면 자유무역지대 비슷한 기능을 하던 무역항으로서 제노아와 베니스 상인들을 비롯해 아라비아·아르메니아·유대인 등 오리엔트 지역의 여러 민족들이 해상 무역 경쟁을 벌이던 곳이었습니다. 그리고 비잔틴 제국은 날로 강성해지는 오스만 투르크의 눈치를 살펴가며 명맥을 겨우 잇고 있는 처지였습니다. ‘알라신도 부수지 못한다.’는 믿음을 갖고 있던 난공불락의 성벽만을 수호신처럼 의지한 채 말입니다. 다행히 오스만의 전임 술탄 무라드 2세는 통치 기간 중 1422년 콘스탄티노플 도성을 포위하려던 시도가 무위로 끝난 이후 경제적 이득만 취할 뿐 콘스탄티노플을 공략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무라드 2세의 급사로 1451년, 그의 열아홉 살난 아들 메메드 2세가 *다시 술탄의 자리에 오르자 상황은 급격히 변했습니다. 이 야심만만한 젊은이는 콘스탄티노플 정복을 시작으로 세계를 제패하려는 야망을 불태우고 있었습니다. 루멜리 히사르는 말하자면 그 정복을 위한 상징 탑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노벨문학상을 받은 터키 작가 오르한 파묵이 말했듯이 이 도시는 ‘모든 세계 정복의 열쇠이자 세계의 지정학적 심장부’인 보스포루스 연안에 위치해 있었으니까요.
성은 놀랄 만큼 빠른 속도로 지어졌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완공일이 8월 31일이라니 겨우 넉 달 반 만에 그 거대하고 견고한 성을 구축한 셈입니다. 이로써 *보스포루스 해협은 루멜리 히사르와 **아나돌루 히사르, 두 개의 거센 손아귀에 의해 목을 움켜잡힌 형국이 되고 말았습니다. 술탄은 마주보고 있는 두 성에 군대와 대포를 배치함으로써 해협에 대한 완전한 통제권을 거머쥐게 되었고 비잔틴 제국의 보급로를 손에 넣게 되었습니다. 콘스탄티노플 공략을 위한 강력한 교두보가 마련된 셈입니다.
** Anadolu Hisar, ‘아시아의 성’이란 뜻으로 메메드 2세의 조부인 술탄 바예지드가 1394년 보스포루스 해협의 아시아 쪽 연안에 지은 요새. 바예지드는 당시만 해도 비잔틴 황제의 승인 아래 이 성을 지었다. 하지만 메메드 2세는 그 모든 절차를 무시하고 일방적으로 루멜리 히사르를 신축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항의의 뜻으로 도성 안에 있던 600명가량의 투르크 인들을 붙잡아 감금했지만 곧 부질없는 짓임을 깨닫고는 모두 석방했다.
술탄은 포고령을 내려 보스포루스 해협을 오가는 모든 선박으로 하여금 요새 앞에 멈추어 검문을 받도록 했습니다. 명령을 어기는 배는 침몰시킨다면서 위협적인 대포 3문을 바다와 가장 가깝게 지은 탑에 배치시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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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초 흑해에서 출항한 두 척의 베니스 선박이 정지 명령을 거부했다가 대포의 공격을 받았으나 용케 도망쳤습니다. 하지만 2주 후 똑같은 시도를 하던 세 번째 선박은 포탄에 맞아 침몰하고 선장과 선원들은 포로로 잡혀 참수를 당해야 했습니다. 보스포루스 해협은 삽시간에 공포의 바닷길로 변해 버렸습니다. 그와 함께 술탄의 콘스탄티노플 공략 시점도 점점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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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일행은 그 살벌했던 보스포루스 해협을 아무런 제지도 받지 않고 유람선을 타고 통과했습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바다와 주변 풍경, 그리고 요새는 난생 처음이라고 감탄을 거듭하면서…. 하지만 어느 순간 저 우뚝 솟은 루멜리 히사르 성 위에서 대포알이 우리 머리 위로 쏟아지고 있다는 상상을 하자 등골이 서늘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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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우리는 루멜리 히사르의 가장 높은 성탑까지 위험을 무릅쓰고 올라가 보았습니다. 그 당시 병사들이 대포와 화살을 어떤 위치에서 어떻게 쏘았는지 실감해 보고 싶어서입니다. 참 아슬아슬했습니다. 난간도 없는 가파른 계단을 걸어 올라갈 때는 다리가 후들거릴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모험한 보람이 있었지요. 전망이 탁 트인 보스포루스를 바라보고 있으려니 발 밑은 비록 아찔했지만 술탄이 왜 여기에 요새를 구축했는지 이해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아이러니한 것은 지금은 그 무시무시했던 루멜리 히사르가 박물관 겸 야외 공연장으로 탈바꿈해 있다는 사실입니다. 전쟁과 평화는 동전의 양면이었습니다.
그런 예는 많습니다. 이스탄티노플 이야기 5편에서 소개한 갈라타 타워도 오랜 기간 군사용 감시탑으로 쓰였지만 지금은 나이트클럽과 레스토랑으로 쓰이고 있지 않습니까.
물론 그 반대인 경우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전쟁이 나면 평화롭던 학교 교실은 포로수용소가 되고 운동장은 적들의 제식 훈련장이 되고 극장은 야전 병원이 되는 경우는 우리도 이미 60년 전에 겪지 않았습니까.
역사는, 그리고 전쟁은 우리에게 많은 것들을 가르쳐 줍니다. 그런 의미에서 동서고금의 전쟁에 관한 격언 중 음미할 만한 몇 개를 소개합니다. 지금 내가 쓰고 있는 전쟁 이야기와도 맥락이 닿는 금언들입니다.
“평화를 원한다면 전쟁을 준비해라.”-로마 격언
“국력은 방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침략에 있다.”-아돌프 히틀러
“항상 전쟁을 대비하는 것이야말로 전쟁을 피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맨토르
“인간이 존재하는 한 전쟁은 있을 것이다.”-알버트 아인슈타인
“전쟁의 세계에는 두 마디 단어밖에 없다. 이기느냐, 지느냐.”-윈스턴 처칠
“휴전은 다음 전쟁의 서곡에 지나지 않는다.”-이승만
“전쟁은 정치와 외교의 연장이다.”-칼 폰 클라우제비츠
많은 격언들이 평화를 지키는 가장 유효한 수단으로 아이러니하게도 전쟁 준비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가장 중요한 건 방위력, 자주국방입니다. 그러나 그에 못지 않게 주변 국가, 이해 당사국들과의 신뢰 및 우호 협력 관계 역시 너무나 중요함을 이어지는 다음 편(9편)에서 절실하게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지도는 15세기 후반 콘스탄티노플의 모습을 담고 있다. 현대 지도를 쓸까 하다가 비록 축적과 원근감은 애매하지만 바다 모양이 뚜렷하게 강조되어 있어 등장시켜 보았다. 왼쪽 육지 성벽 옆 해자 모양도 바다를 연상시킬 정도로 과장되게 그려져 있다. 아래는 마르마라 바다, 콘스탄티노플과 갈라타 사이를 흐르는 건 골든혼이다. 오른쪽 위의 해협이 바로 보스포루스이다. 보스포루스 왼쪽 연안은 유럽, 오른쪽 연안은 아시아다. 따라서 루멜리 히사르(왼쪽 동그라미)와 아나돌루 히사르(오른쪽 동그라미)는 대략 저 위치쯤에 있었을 것이다.
※ "이스탄티노플"에 대해 포스팅한 모든 내용은 지속적으로 수정/업데이트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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