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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1월 이스탄불 군사 박물관을 방문했을 때 오스만 투르크 군이 배를 끌고 산(언덕)을 넘어갔다는 생뚱맞은 얘기를 들었습니다. 처음엔 통역 실수려니 생각했습니다.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는 우리 속담이 있지만, 그거야 뭔가 어수선하고 중구난방인 상황에선 엉뚱한 일도 일어날 수 있음을 경계하는 말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 말도 안 되는 일이 실제로 일어난 것입니다. 또 그로 인해 세계 전쟁사를 바꾼 일대 전기를 만들었다니, 경이롭지 않습니까. 네, 그렇습니다,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도시 ‘이스탄티노플’에서 1453년에 엄연히 있었던 명백한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 주인공이 바로 술탄 메메드 2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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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든혼을 가로질러 선박의 침입을 봉쇄했던 방어 철책(위 그림 오른쪽 상단 및 아래 사진 참고)을 직접 보고 난 뒤로는 술탄이 배를 끌고 언덕을 넘어갔다는 역사적 사실이 감동을 넘어 전율로 다가왔습니다. 특히 엄청난 굵기의 쇠사슬을 보자 비로소 1453년 전쟁 당시의 분위기가 눈에 잡힐 듯 실감이 났습니다. 그때부터입니다. 나는 21세의 청년 술탄(메메드 2세)에게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고, 알면 알수록 매료되었습니다. 나중엔 술탄과 그가 점령한 콘스탄티노플이란 도시에 매몰되다시피 해서 틈만 나면 관련 서적을 읽고 자료를 뒤적였습니다. (국회의장 시절 여야 격돌의 소용돌이 속에서 나는 청년 술탄과 그의 야심찬 정복 전쟁, 콘스탄티노플의 결사항전을 떠올리면서 오히려 마음을 차분히 달랠 수 있었습니다. 처절했던 당시 상황에 지금 국회를 비교할 순 없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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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 문헌에는 메메드 2세의 참모로 일한 이탈리아 사람(성명 미상)이 아이디어를 제공했다고 나옵니다. 그러나 그런 사실 자체가 애매하고 불분명한데다가 만약 그랬다 해도 그것은 *평지 이동이었습니다. 술탄의 사례와는 차원이 다른 것이었지요. 술탄은 최소한 해발 60미터에 이르는 산등성이와 언덕을 수많은 배를 끌고 넘어갔습니다. 20층 빌딩 높이와 맞먹는 험한 비탈길을 바다(0미터)에서부터 끌고 간다니, 감히 상상인들 하겠습니까. 하지만 그것을 21세의 청년 술탄은 해냈습니다. 비상한 두뇌와 강력한 리더십이 없다면 꿈도 못 꿀 일이지요. 4월 22일 동틀 무렵부터 정오까지가 배를 끌고 간 본격적인 시간이었습니다. 그 대대적인 거사를 위해 술탄은 **4월 21일부터 보스포루스 해변 쪽과 골든혼 안에 있는 카슴파샤 지역에 걸쳐 대규모 인력과 장비를 동원한 육로 뱃길 공사를 했습니다. 그러면서 포병 부대에게 간간이 페라 지역을 향해 대포를 쏘라고 지시합니다. 주의를 분산시키고 눈길과 관심을 딴 데로 돌리면서 상상력을 차단시키기 위한 일종의 교란 작전이자 위장 전술입니다.
**4월 21일은 육지 성벽에 대대적인 포격을 가해 콘스탄티노플 성 안에 있는 병사와 시민들이 이 계획 자체를 생각지도 못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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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관(壯觀)’이란 말로는 표현이 너무나 부족합니다. 술탄은 출항이라도 하는 것처럼 언덕을 오르는 배들에게 돛을 드높이 올리고 노잡이들을 승선시켜 노를 앞뒤로 움직이게 했습니다. 뱃머리에서는 악사들이 북을 치고 트럼펫을 연주했습니다. 놀이동산 바이킹도 그 광경을 보았더라면 순간 무색해졌을 것입니다. 독심술이 뛰어났던 걸까요. 술탄은 그렇게 병사들로 하여금 전쟁을 카니발처럼 치르게 했습니다.
정상에 오른 배들이 골든혼을 향해 언덕을 내려갈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더욱더 세차고 무서운 기세로 배들을 바다에 밀어 넣었습니다. 무려 70척이나 되는 크고 작은 배들이 깃발을 펄럭이며 요란한 군악대 소리에 맞추어 골든혼으로 철석철석 내려왔습니다. 그걸 본 비잔틴 인들은 아연실색하면서 공포와 전율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심리전 효과까지 노린 것입니다.
이 사건은 전쟁의 분수령이 되었습니다. 오스만 군의 사기는 하늘로 솟구친 반면 비잔틴 진영의 분위기는 바닥으로 곤두박질쳤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그 크고 수많은 배들을 술탄은 *무슨 재주로 이동시켰을까요.
내가 읽은 책에는 배를 이동시킨 육로가 애매하게 서술돼 있습니다. 게다가 유감스럽게도 이스탄불 현지에서 만난 학자와 전문가들조차 배의 정확한 이동 경로를 자세히 아는 이가 없었습니다.
이방인인 나는 그러나 그 경로를 내 나름대로 유추 혹은 규명해 보려고 단지 지도 몇 장만 들고서 며칠 동안 이 궁리 저 궁리하며 자동차와 도보로 4~5차례나 그 주변을 탐색했습니다. 메메드 2세('파티'; 정복자)와 텔레파시라도 통했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했습니다.
여기서 잠깐, 택시(Taxi)는 터키에서도 탁시(Taksi)로 표기한다. 탁시 뒤에 m자 하나를 붙이면 탁심(Taksim), 내가 서 있는 데서 멀지 않은 곳에 자리한 ‘이스탄불의 명동’ 격인 번화가 이름이 된다. “탁심에 가려고 탁시를 잡았다.”, 이런 표현이 가능해진다.
‘바로 이 길이다!’ 싶은 곳에서 ‘혹시나’ 하고 물어 봤지만 답은 매번 ‘역시나’였습니다. 그러던 중 술탄과 텔레파시가 통한 걸까요. 내가 애초 생각했던 이 길(테페바쉬)로 ‘배가 내려갔다’는 말을 할아버지로부터 들었노라고 몇몇 사람들이 증언해 주었습니다. 뛸 듯이 기쁘더군요. 더위와 피로가 눈 녹듯 사라졌습니다. 사학자(런치만), 작가(나나미), 현지 교수(페리둔) 모두 주장이 다른데 나도 내 견해를 주장해 보자 싶었습니다. 그래서 ‘제4의 길’로 갔습니다. 현지인들이 믿고 있는 그 길로! (약도 별첨)
이스탄불대학교 역사학과장인 페리둔(Feridun M Emecen) 교수는 3가지 경로를 그 가능성으로 제시했습니다. 첫째는 런치만의 경로(톱하네→카슴파샤 설), 두 번째(돌마바흐체→카슴파샤 설)와 세 번째는 그보다 이동 반경을 조금씩 더 넓혀 놓은 경로입니다. 페리둔 교수는 그 중 3안이 자기 의견이라고 말했습니다. 경사가 급한 언덕보다는 그보다 멀더라도 완만한 평지를 택했을 것이란 견해입니다.
답답함을 풀기 위해 여러 차례에 걸쳐 그 주변을 이리저리 헤매고 다녔지만 그 사이에 이미 지각 변동이 일어나고 도시 계획으로 길들도 변경된 그 지역에서 550여 년 전의 흔적을 찾기란 실로 난망한 일이었습니다. 그래도 나는 사막에 떨어진 동전 하나를 찾으려는 사람처럼 축구장을 건설중인 테페바쉬란 마을과 *페라팰리스 호텔 주변 등을 샅샅이 훑고 다녔습니다. (이동 경로는 맨 끝에 부록으로 처리했습니다.)
배를 골든혼 바다에 성공적으로 진입시킨 술탄은 다음 작전으로 *부교(浮橋)를 설치합니다. 부교 옆에는 튼튼하고 널찍한 받침대를 두어 거기서 블라케르나에 성벽을 향해 대포를 쏘았습니다. 식량과 무기 등의 물자와 병력도 부교를 통해 이동시켰습니다. 기동력이 훨씬 빨라졌습니다.
부교의 위치에 대해서는 의견이 조금씩 엇갈립니다. 이스탄불정복자협회에선 육지 성벽이 끝나고 골든혼 쪽 성벽이 시작되는 곳에서 조금 아래 지점에 현판을 세워 두었지만 그건 술탄의 치적을 알리기 위한 것일 뿐, 부교의 위치가 있던 자리는 아닌 것 같다는 게 내 생각입니다.
아무튼 배가 언덕을 넘고 골든혼을 가로질러 다리가 놓이면서 다이내믹한 육상 전투와 스릴 넘치는 해상 전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계기가 마련되었습니다.
「꿈을 찍는 사진관」(강소천 지음)이란 동화처럼 과거를, 역사를 사진 찍어 주는 카메라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골든혼 주변과 페라 지역을 탐사하면서 그런 상상을 몇 번이나 했는지 모릅니다. 너무나 불분명한 것들이 많고 책마다, 또 학자마다 견해가 제각각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인문학의 힘은 상상력에 있는 것. 내가 수집한 팩트와 정보에 상상력을 가미해 내 나름대로 역사를 재구성해 보는 재미도 적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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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가위 전에 한 편을 더 올려야 한다는 강박관념 속에서 6편을 힘겹게 마무리 지었습니다.
7편은 어떤 이야기로 이어질까요. 아래 그림에 그 힌트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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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P=더 깊이 알고 싶은 분들을 위한 탐구 학습 코너 ##
국내에서 그 동안 배의 육지 이동 경로를 파악할 수 있는 기존 자료는 런치만과 나나미의 책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나나미는 아예 이 부분에 대한 언급을 회피했고 런치만의 설명 역시 애매했습니다.
현지에서 이스탄불대학교 페리둔 교수를 만나 이 부분만 놓고 30여 분간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웬걸요, 혼란만 보탰을 뿐입니다. 교수는 이때껏 통설처럼 여겨져 온 톱하네 설(1)을 부정하고 돌마바흐체 설(2)을 제기했습니다. 그러면서 조심스럽게 훨씬 더 먼 길로 돌아가는 제3 가설까지 거론했습니다.(페리둔 교수는 톱하네가 언덕이 너무 가팔라 현실적으로 이동이 불가능하다고 주장했습니다. 제3설의 구체적 내용은 지면 관계상 생략합니다.)
나는 ‘이스탄티노플’을 떠나던 날도 풀리지 않는 화두를 짊어진 수도승처럼 다시 시간을 짜내어 이 지역을 왔다 갔다 했습니다. 골목길, 좁은 길, 일방통행 길. 참 복잡했습니다. 몸도 마음도 지쳤습니다. 시간마저 내 편이 아니었습니다.
하도 답답해 지역 주민들에게 물어 보았습니다. “정복자 메메드가 배를 끌고 간 길이 이곳인가요?”
드디어 한 동네(테페바쉬)에서 가뭄에 단비 같은 대답을 듣게 되었습니다. “어릴 적 우리 할아버지한테서 그렇게 들었어요.”
나는 왔던 길을 되짚어 그 길을 다시 갔습니다. 런치만의 영국 대사관 설을 뒤집고 페라 관광호텔 설을 새로 제기하기도 하면서 그 거리를 헤맸습니다. 결국은 땀에 흠뻑 젖은 몸으로 샤워를 하는 둥 마는 둥 하며 귀국 비행기 길에 올라야 했습니다.
그게 끝이 아니었습니다. 나는 서울에서도 이스탄불과 계속 연락을 취해가며 뭔가 새로운 자료가 나타나기를 기다렸습니다.
이 글을 블로그에 올리기 직전 또 하나의 번역본이 입수되었습니다. 바로 페리둔 교수의 제자인 바자르(Mahmut Ak-Fahameddin Baʂar) 교수가 근간한 터키어 원본(『Istanbul’un Fetih Gṻnlṻĝṻ』-이스탄불 함락 일지)을 우리말로 옮긴 자료입니다.
야호!(호야?) 바로 내가 주장하였던 배들의 이동 경로가 그 책에 그대로 제시돼 있었습니다. 특종(?)을 놓친 아쉬움과 내 수고가 헛되지 않았다는 안도감! 진작 손에 넣었더라면 그런 생고생은 하지 않았으련만….
이왕 수고한 것. 그 책은 지도 없이 큰 방향만 나와 있으므로 나는 좀 더 친절하게 내가 생각하는 배의 이동 경로를 자세하게 지도로 표시해 서비스하려고 합니다. 그 결과물이 바로 아래에 있습니다.
지도를 클릭하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톱하네(대포알 공장)부터 쿰바라치 언덕길, 아스말르 메스지드, 테페바쉬, 카슴파샤 등과 골든혼 연안을 샅샅이 훑고 다녔다. 골든혼 봉쇄 사슬이라는 방어벽을 만난 술탄이 함대를 이끌고 언덕을 넘어 바다로 간 경로이다. 톱하네에서 카슴파샤로 이어지는 빨간색 화살표 부분은 내가 독창적(?)으로 제기하고 바자르 교수가 뒷받침한 노선이다. 실제로는 매우 복잡한 길인데 이해하기 쉽게 단순화시켰다. 2설(초록색)과 3설은 그보다 좀 더 위쪽(3설은 지도 밖)으로 선이 그어진다.
6편을 올리고 나서 아이디 ‘술탄’님(한양대 이희수 교수)이 네이버 블로그에 덧글을 남겨 주셨습니다. 이런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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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마다 이어지는 술탄님의 뜨거운 관심과 날카로운 지적에 감사드립니다. 메일로 보내주신 제3안 스캔 사진도 잘 받았습니다. 터키 고등학교 역사 교과서에 실린 자료라면 사학계의 주류 의견이겠군요. 페리둔 교수의 3안은 베식타쉬(돌마바흐체보다 더 위쪽, 초기 해군 집결지)→옥메이다니(에윱 모스크 맞은편 지역, 골든혼 거의 끝 쪽)였습니다. 하지만 술탄님 말씀대로 ‘역사적 사실이란 정확한 진실이 확인될 때까지만 유효’하다는 측면에서 내 견해를 포함한 이 모든 주장에 의미를 두고 싶습니다.
이스탄불대학 페리둔 교수와 동문수학한 사이라니 더욱 반갑습니다. 페리둔 교수에게도 술탄님 안부를 전하겠습니다.
지적해 주신 ‘골든혼 내해에 배를 내린 시점’은 내가 잠깐 착오한 것 같습니다. 런치만 책(169쪽)에 ‘4월 23일 일요일’로 되어 있지만 요일 계산을 해보니 ‘4월 22일 일요일’이라야 맞습니다. 다른 문헌을 보아도 4월 22일이 정설인 것 같아 내 블로그 내용을 수정했습니다. 이동 함선의 수는 40척부터 80척까지 견해가 다양해 그 중 런치만의 추정(70척 가량)을 따랐음을 밝혀 드립니다. ‘동틀 무렵부터 정오까지’는 내가 읽어 본 책들이 대부분 이 설에 입각해 서술돼 있었습니다. 술탄님 지적대로 ‘밤을 이용했다’는 것도 설득력이 있지만, 그보다는 술탄(메메드 2세)의 성격상 ‘적들에게 시각적인 공포와 전율을 주는 효과’를 노렸을 것 같다는 게 내 생각입니다. 특히 내리막길에서는 말입니다.
아래 지도는 술탄님이 보내 준 터키 역사 교과서에 실린 자료입니다. 교과서에 표시된 경로(분홍 선) 외에 내 블로그에 서술된 1안(빨간 선)·2안(초록 선)·3안(파란 선)도 참고삼아 표시해 놓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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